동양에 밥이 있다면, 서양에는 빵이 있다. 아니, 이제 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든 주식과 간식으로 즐겨 먹는다. 나 또한 이러한 시류에 발맞춰 자타공인 ‘빵돌이’로 거듭났고, 오늘도 자연스럽게 빵으로 한 끼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손에 집어든 빵을 곰곰이 뜯어보며 원초적인 고민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이 녀석, 어쩌다 우리를 먹여 살리게 된 거야?’
역사 속 빵의 발자취
인류 역사와 함께 자라 온 음식이다 보니, 빵의 정확한 연원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빵과 인류 기록상 최초의 빵은 기원전 26세기에 등장한다. 그 무렵 고대 이집트 파라오 쿠푸의 딸인 네페르티아베트 공주의 무덤 벽화에 빵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즈음을 전후로 이 지역 사람들은 빵을 주식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민족들이 고대 이집트인들을 ‘빵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정도라고. 이때의 빵은 밀가루 반죽을 그대로 화덕에 구워 낸, 그야말로 가장 기초적인 빵이었다.
빵을 세는 필경사가 등장하는 고대 이집트의 벽화 (CC BY-SA kairoinfo4u)
빵은 지중해를 거쳐 유럽으로 넘어왔다. 그리스 시대에는 축제 기간에만 구워 먹을 정도로 빵이 귀했다. 그런데 로마가 대제국을 이룩하기 시작하면서 빵이 생활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주변 국가를 정복하며 영토로 편입시킨 밀 곡창 지대가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기원전 241년 제1차 포에니 전쟁 직후 시칠리아 섬을 차지하면서 밀을 무상 배급했다. 기원전 1세기경 이집트로부터 나일강 곡창을 빼앗은 뒤에는 아예 빵을 만들어 빈민들에게 나눠줬다. 제빵사들을 ‘민생 복지에 중요한 사람들’이라 칭하며 고도로 숙련된 기능공에 맞게 대우하고, 이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하고 관리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귀를 이용한 회전식 제분법으로 밀가루를 생산했으며, 원통형의 통에 각종 재료를 넣고 혼합하는 기계식 반죽법도 최초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는 ‘상류층의 은혜’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 시민들이 직접 빵을 만들고 소비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빵 문화는 17세기 후반 효모균이 발견되면서부터 꽃피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는 어떤 빵을 먹느냐가 재력을 가르는 잣대로 작용하곤 했다. 당시에는 하얗게 제분된 밀가루를 충분하게 생산하기 힘들었기 때문인데, 따라서 흰 밀가루로 만든 흰 빵이 부의 상징으로 통했다. 상류층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보다 하얗고, 한층 부드러운 빵을 선호했다.
빵 전파의 숨은 공신, 잉카인과 옥수수
한편 남아메리카 잉카인들은 난 모양의 빵을 주식으로 삼았다. 그 재료는 옥수수였다. 그런데 이 옥수수는 유럽 빵 대중화에 커다란 몫을 차지하게 된다. 대량 재배가 가능한 작황 특징 때문이다. 당시 유럽 빵의 주재료는 호밀과 밀이었다. 하지만 둘 다 귀하고 대량으로 재배하기 어려웠다. 반면 옥수수는 유럽 땅에서도 잘 자라거니와 이른바 ‘가성비’가 호밀과 밀에 비해 매우 뛰어났다. 이를 깨달은 유럽인들은 옥수수를 애용하기 시작했고, 주로 빵이나 죽 형태로 요리해 삼시세끼를 먹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잉카족을 미개인 취급해 그들의 식문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잉카인들은 옥수수를 유럽에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옥수수 빵에 물고기나 콩을 꼭 갈아 넣어 훨씬 더 건강한 방식으로 빵을 섭취했다.
1945년 황해도 옹진에 문을 연 ‘상미당’ 상상도
우리나라에 안착한 ‘서양떡’
18세기 초, 연행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당도한 이기지는 부드럽고 달콤하며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는 신기한 음식 ‘서양떡’을 맛본다. 그 맛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자신의 연행록인 『일암연기』에 그 맛을 기록해 놓았다. 북경 내 성당에서 이 음식을 맛본 점,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니 서양 사람들이 사탕‧계란‧밀가루로 만든다고 했다는 점으로 미뤄보아 서양떡은 아마도 카스텔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빵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다.
중국에서 조선과 조우한 빵은 19세기 말, 일본을 통해 한반도에 도착한 이후 빠르게 퍼져 나간다. 여러 종류의 빵 중 인기가 높았던 것은 단맛이 강한 계란빵. 주로 구하기 어려운 이스트 대신 탄산수소나트륨을 써서 만들었는데, 특히 학교 운동회 빵 먹기 대회에 많이 쓰였다고 한다. 한편 밀가루 대신 현미가루와 청주를 빚을 때 쓰는 누룩으로 만든 현미빵도 인기를 모았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 여러 빵집이 들어섰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1945년 황해도 옹진에서 문을 연 상미당이다. 상미당은 오늘날 SPC그룹으로 성장, 프랑스‧미국 등 이른바 ‘빵의 본토’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장족의 발전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파리바게뜨에서 선보이는 천연효모빵
‘빵심’이 밥심을 대신하는 시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인당 쌀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줄었다. 그 양만 해도 자그마치 14kg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1인 가구의 증가와 빵 소비 증가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밥심 대신 빵심’을 외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무설탕 식빵‧토종 효모 빵‧통오트밀 토스트 등 건강을 중시하는 시대의 요구에 발맞춘 빵 출시가 빵심의 성장 곡선을 한층 더 가파르게 만들고 있다.
나라‧지역‧문화‧트렌드에 따라 소비 형태와 선호도가 천차만별이므로, 빵의 미래를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 식문화의 흐름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예견은 가능하다. 1인 가구와 혼밥족의 증가에 따라 소포장 간편식이 보편화될 것이다. 헬스케어와 개성을 중시하는 사회 흐름은 ‘적더라도 제대로 챙겨 먹겠다’는 의식의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트렌드 전문가들은 이를 ‘건강 럭셔리식의 확대’라고 표현한다. 이를 종합하면 ‘간편하면서도 내 입맛에 꼭 맞춘 건강식’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파리바게뜨가 빵의 기본이자 중심인 식빵에 영양학과 다양화를 적극적으로 녹여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빵은 우리나라 식문화의 변두리가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팔색조로 변신하는 우리네 주식 중 하나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서양은 말할 것도 없고, 식문화에 대해 다소 보수적인 중국인들도 빵 맛을 알아가고 있다. 이들은 한국 빵, 특히 파리바게뜨에 열광한다. 주도면밀한 현지화‧고급화 전략의 결과다. 앞으로 빵은 어떤 변신으로 우리를 즐겁게 할까. 분명한 것은, 빵은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인류와 함께 할 것이라는 점이다.
글. 문화칼럼니스트 강진우 님